저는 외국인 요양보호사 입니다.

저는 일본 노인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본의 요양원에서 만난 재일교포 할머니들과 만남 그리고 이별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1. 니 조선 사람이가?

내가 근무하는 일본 노인요양원에 한국 할머니가 입소하셨다. 어색한 모습으로 요양원에 들어오신 김복자 할머니는, 나와 처음 인사를 하실 때 내게 조선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첫 만남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의 일이다. 요양원에 출근한 후, 아침 회의 시간에 직장 상사로부터 오늘의 주요 사항에 대하여 전달받았다.

특히 오늘은 요양원에 새로이 입소하시는 할머니가 들어오시는 날이다. 며칠 전에 약간의 정보를 들어서 미리 인지하고 있던 사항이었다. 새로 입소하시는 할머니는 한국인이라고 했다.

새로운 입소자 할머니의 이름은 김복자라고 했으며, 한국 국적이지만, 일본에서 아주 오래 사셨던 분이라 일본어로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일본인 직원들이 개호 업무를 진행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전달받았다.

치매의 정도는 거의 없는 수준의 요개호 1의 단계라고 했다. 요개호 1이라면 치매 증상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다. 약간만 주의하면 되는 정도의 레벨이다. 다만 단기기억력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같은 말 혹은 질문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시다고 한다.

일본에서 치매는 총 7단계로 나뉘어 있다. 요지원 1,2부터 요개호 1~5까지다.

요양원으로 오시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자, 케어매니저와 함께 요양원 현관으로 들어오시는 김복자 할머니가 보였다.

작은 체구를 가지셨으며,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이셨다. 할머니는 기운이 없고 침울한 표정 이셨다. 아마도 시설에 입소할 수밖에 없는 본인의 처지에 약간 우울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노인이 처음 요양원에 입소할 때 겪는 침울한 심적인 고통을 동일하게 겪고 계신 듯 보였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오셔서, 시설 대표와 캐어 매니저와 함께 약간의 입소 절차를 거치고 일본어로 인사를 나누는 듯했다. 그리고 앞으로 거처할 본인의 개인 방으로 안내받아서 들어가셨다. 얼마 되지 않은 짐보따리를 풀어 정리를 하고 계시는 듯했다.

시설 대표는 나에게 와서, 할머니가 우울해하고 계신 것 같으니, 가서 한국어로 인사라도 하고 잠깐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지 내 의견을 물어보는 듯한 지시(?)를 했다.

나는 할머니의 방문 앞에서 노크하며 할머니의 방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방에 좀 들어가도 될까요?”

라는 인사를 하며 방 안쪽의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들리는 한국어에 할머니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며 대답하셨다.

응? 니 조선 사람이가?

김복자 할머니는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내 인사에 반응하셨다.

할머니의 첫 반응에 약간 웃음이 나왔다. 조선 사람 이라니?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갑자기 조선?

“네! 조선 사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데이~”

“아이고 마, 반갑데이~ 여서 조선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갑다. 내 마음이 이제야 놓인다”

“네, 앞으로 여기서 편하게 지내시고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셔도 되고 직원들 누구에게라도 말씀하시면 됩니다”

“고맙데이, 하고마~ 참말로 다행이데이”

잠깐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내 업무로 복귀했다. 그 뒤 점심 휴식 시간이 되었다. 나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서 김복자 할머니의 방에 가 보았다.

할머니는 새로운 곳이 아직 낯설어 그러신 것인지 침대에 계속 누워만 계셨던 것 같았다.

김복자 할머니의 인생을 듣다

할머니는 나에게 본인의 인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시간을 거슬러 일제강점기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6/25 한국전쟁을 지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거쳐 현재의 이야기까지 해 주셨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야기, 젊은 시절에 본인이 한국에서 일했던 이야기, 일본에 오신 이야기, 일본에서 갖은 고생을 하시며 일생을 지내오신 이야기,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생활하시다가 이곳 일본요양원까지 오시게 된 거의 백 년의 시간을 이야기 해 주셨다.

순식간에 듣게 된 한 사람의 근 백 년에 가까운 인생 여정이었다.

요양원에 근무하고 있으면,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인생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듣다 보면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생각도 하고, 황당한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새옹지마 같은 오르내리는 듯한 인생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고령의 노쇠로 인한 기억력의 변화 그리고 치매 증상이 일반적으로 있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쇠퇴한 기억력, 뭔가 순서가 뒤섞인 듯한 시점들, 다른 사람과의 혼동 등이 골고루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것 또한 당신의 삶인 것을. 최대한 노인들을 존중하며 이야기를 들어드린다. 그것 또한 노인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단기기억에 약간 문제가 있으심

다음날 출근 후, 김복자 할머니의 방에 가서 한국말로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잘 주무셨어요?”

할머니는 하룻밤 사이에 내 얼굴을 잊어버리신 듯했다.

“니 조선 사람이가? 와 그리 조선말을 그리 잘하노?”

어제와 같은 반응이다. 아마도 당분간 매일 아침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 같다. 이날도 할머니는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대하드라마를 나에게 들려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셨다.

“나는 1970년에 부산에서 배 타고 일본 왔다. 시모노세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왔데이~ 니는 뭐 타고 왔노? 니도 배 타고 왔나?”

나는 시모노세키라는 곳도 그때 처음 들었으며, 사실 지금도 그곳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이고 할머니요~ 요즘 누가 배 타고 일본에 옵니까? 저는 비행기 타고 왔어요”

“요즘에는 배 없나?”

“배도 있지만, 배가 좋아서 일부터 타는 것 제외하고는 요즘에는 일본 올 때 배보다는 비행기를 타고 와요”

그 뒤 며칠 동안이나 연속적으로 ‘니 조선 사람이가?’라는 질문을 반복하신 할머니는 약 한 달 정도 지나자 드디어 내 얼굴을 기억하실 수 있게 되었다.

김복자 할머니가 입소하신 지 벌써 6년이 되어간다. 연세가 90이 넘으셨지만, 크게 건강이 나쁘지도 않으시고 정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 할머니 인생 마지막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되어드리리라 오늘도 다짐해 본다.


2. 누님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홍순자 할머니는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오신 분이셨다. 일본에 오실 때 아직 갓난아기였던 남동생이 있었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부모님은 일본에서 계속 지내셨으나, 남동생은 한국이 독립을 한 후 한국에서 살겠다며 전라도 나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당신은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지만, 그간 살아오면서 동생을 만나러 자주 한국에 가셨다고 했다. 사실 할머니는 자주라고 표현하셨지만 근 100세가 되실 때까지 열 번 남짓 나주 영산포에 가셨던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본인의 고향은 전라도라고 항상 말씀하셨으며 한국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나에게 자주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런 마음이 애틋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모국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항상 나에게 잘 전달되었다.

할머니의 방에 가 인사를 드릴 때면, 할머니는 항상 작은 액자를 손으로 쓰다듬고 계셨다. 작은 액자 속에는 이미 색이 바래 누르스름해진 편지 한 장과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사진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하나뿐인 남동생 사진이었다. 편지는 그 남동생으로부터 오래전에 받은 편지라고 내게 말해주셨다.

남동생은 할머니보다 먼저 하늘로 가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남동생이 항상 너무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지만, 간혹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해 주셨다.

할머니는 당신의 고향에서 삶은 매우 짧았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잘 사용하셨다. 아마도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모국어일 것이다. 나주의 끝없이 펼쳐진 논밭에 관한 이야기, 예전 영산포구의 이야기 등을 하실 때면 할머니의 눈빛은 갑자기 초롱초롱 빛이 나시는 듯 보였다.

홍순자 할머니는 99세의 연세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할머니의 짐 등을 정리하러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다. 며칠 전까지 침대에 앉아계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이젠 빈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방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작은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작은 액자가 눈에 보였다. 항상 보던 액자이지만 오늘따라 더 애틋하게 보였다. 액자 속의 남동생과 남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아직도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 같았다.

누님, 건강히 잘 계시는 지요

누님.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저는 매일 보고 싶은 누님을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누님 교회는 잘 다니고 계시는지요.

저는 오늘도 교회에 가서 누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왔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으며 신앙생활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누님,

우리가 서로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면서

그날만을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 영산포에서 동생 ㅇㅇㅇ 올림.

……

40년은 더 지나 보이는 색이 바랜 편지지가

행여 찢어질까 두려워서일까

오래된 사진과 오래된 편지를

작은 액자에 넣어, 침대맡에 항상 두었던 할머니.

가끔 방에 홀로 앉아 액자를 만지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

오래전 돌아가신 동생이 그리워

손으로, 눈으로

만남을 이어가셨던,

99세의 재일교포 할머니는

얼마 전 돌아가셨다.

빈 침대와 작은 액자만이

쓸쓸하게 방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그리운 동생을 만나셨을까?

만나셨기를…

죽음…

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가.

그러나

보고 싶은 동생을

만나는 여행이라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정인가.

죽음.

그 허망하고 아름다운 이별이여.

부디…

아름다움의 무게가 더 클지어다.



3. 다음 생엔 따뜻한 날에 가시오.

송명순 할머니는 충청도가 고향이라 하셨다. 할머니는 40대에 일본에 오셔서 줄곧 일본에서 생활하신 분이다. 일본에서 줄곧 일을 하시며 돈을 벌어 한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셨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건강의 악화와 치매 증상까지 나타나 홀로 생활이 불가능하여 요양원에서 약 7년을 지내셨다. 내게 항상 한국에 있는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내가 모셨던 7년의 세월 동안 한국의 아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나름대로 가정사가 있으시겠다며 생각만 할 뿐이었다. 아들에 대한 짝사랑은 치매가 발생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치매 증상이 심하셨지만, 할머니는 항상 본인 방문을 열어두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이 나를 만나러 오늘 오기로 했어”라고 하시며 본인의 방문을 항상 열어 두라고 하셨다.

아들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버리면 안 된다고 하셨다. 아들의 눈에 당신이 잘 보이도록, 당신의 눈에 아들이 잘 보이도록 항상 방문을 열어두라고 내게 당부하셨다.

하염없이 몇 년을 방문만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얼마 전 정월 초하루에 세상을 떠나셨다.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이, 추운 겨울 홀로 그렇게 가셨다.

모두가 가족과 함께 있는 설날에 홀로 먼 길을 떠나셨다.

다음 생엔 따뜻한 날에 가시오

외롭던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인사.

다음 생에는…

방 문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방 안에서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사시오.

다음 생을 마칠 땐, 설날에는 가지 마시오.

설은 너무 춥소. 몸도 마음도 너무 춥소.

설에는 아들과 손주들에게 세배도 받고, 세뱃돈도 주며 그렇게 보내시오.

자식들이 끓인 떡국도 한 그릇 자시고 봄에 가시오.

그때는,

외로이 혼자 떠나지 말고, 가족들 배웅받으며 가시오.

그때는,

남의 나라 말고 당신 고향 서산에서.

따뜻한 봄날에 가시오.

그게 좋지 않겠소?

그렇게 내가 빌어 드리리다.

내가 당신 대신 빌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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